춘천효자동성당

St. Maria Goretti · 1890 – 1902 · 용서와 순결의 증인
마리아 고레띠는 1890년 이탈리아 코리날도의 가난한 농부 가정에서 태어나, 아홉 살에 아버지를 여읜 뒤 집안 살림과 어린 동생을 돌보며 자랐습니다. 1902년, 함께 살던 청년 알레산드로 세레넬리가 겁탈을 시도하자 끝까지 저항하다 흉기에 찔려 선종했으며,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가해자를 용서했습니다. 1950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시성되었고, 오늘날 용서와 순결, 하느님께 대한 신뢰의 증인으로 청소년과 성폭력 피해자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습니다.
소작농 집안의 딸로 정식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상냥하고 신앙심 깊은 아이로 자랐습니다. 다섯 살 무렵 가족은 작은 농장마저 정리하고 다른 지주의 땅을 부치는 소작농이 되어, 로마 남쪽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힘겹게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아버지 루이지는 고된 노동과 열악한 환경 속에 말라리아에 걸려 1900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리아가 겨우 아홉 살 때였습니다. 그 후 어머니와 오빠·남동생들이 들에 나가 일하는 동안, 마리아는 집안 살림을 도맡고 아직 어린 막내 여동생을 돌보며 가족을 지켰습니다.
1902년 7월 5일 크게 다친 마리아 고레띠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상처가 너무 깊어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다음 날 임종을 앞두고 사제가 병자성사를 주며 “너를 이렇게 만든 사람을 용서해 주겠니?”라고 묻자, 그녀는 “예, 저도 그 사람을 용서하고, 그도 죽은 뒤 천국에서 제 곁에 오기를 바라며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앗아간 이를 향한 이 용서는, 원망이나 복수심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러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용서는 곧바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가해자 알레산드로 세레넬리는 30년형을 선고받았고, 처음 3년 동안은 자신의 잘못을 완강히 부인하며 마리아의 용서를 외면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교도소를 사목 방문한 주교에게 그는 자신이 꾼 꿈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꿈속에서 마리아가 그에게 백합꽃 한 다발을 건넸는데, 그가 받아 들자마자 꽃이 타 없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꿈을 통해 마리아의 용서가 자신이 죄를 감추려 했던 것보다 훨씬 큰 힘을 지녔음을 깨닫고, 비로소 진심으로 뉘우쳤습니다.
모범수로 감형되어 27년 만에 출소한 알레산드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마리아의 어머니 아순타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한 것이었습니다. 아순타는 “내 딸이 이미 너를 용서했다”며 그를 끌어안았고, 두 사람은 함께 미사에 참례하기도 했습니다. 훗날 알레산드로는 카푸친 프란치스코회에 들어가 문지기와 정원사로 여생을 보내다 1970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딸을 죽인 이를 용서한 어머니의 사랑과, 피해자 가족과 화해한 가해자의 여생은 마리아의 용서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두 세대에 걸쳐 열매를 맺었음을 보여줍니다.
“당신의 은총은 나의 힘이요 권고요 도움이니이다.
당신의 은총은 모든 원수들보다 강하나이다.”
— 교황 비오 12세, 마리아 고레띠 시성식 강론(1950)
성녀 마리아 고레띠의 용서는 단 한 번의 감정적 결단이 아니라, 죽는 순간의 고백에서 시작해 가해자의 회개와 어머니의 포옹으로 이어진 오랜 과정이었습니다. 용서해야 할 사람이 없을 때 남을 용서하라고 말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잔인한 폭행을 당해 복수심이 끓어오를 때도 용서를 떠올릴 수 있을까요? 이 물음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마리아 고레띠는 1947년 4월 27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이 시복식에는 어머니 아순타가 참례하였는데, 자녀의 시복식을 지켜본 최초의 어머니로 기록되었습니다. 3년 뒤인 1950년 6월 24일, 마리아 고레띠는 같은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지켜보려는 인파가 너무 많아 성 베드로 대성전 안에 다 들어갈 수 없었고, 결국 시성식은 대성전이 아닌 성 베드로 광장에서 거행되었습니다. 이는 대성전 밖에서 열린 사상 최초의 시성식으로 기록되었으며, 약 25만 명의 신자와 순례자들이 광장을 가득 메웠습니다.
그 인파 속에는 마리아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알레산드로 세레넬리도 있었습니다. 66세가 된 그는 25만 군중 가운데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시성식에 참례했습니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시성식에 함께한 이 장면은, 마리아의 용서가 단지 말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한 인간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켰음을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교황 비오 12세는 이날 강론에서 마리아 고레띠를 ‘20세기의 성녀 아녜스’라 칭송하며, 순교자로서만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인다운 덕행을 살아가는 모범으로 그녀를 제시했습니다.
성녀 마리아 고레띠의 짧은 생애는 가난과 상실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은 신뢰, 죽음 앞에서도 지켜낸 순결, 그리고 원수까지 끌어안은 용서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녀는 오늘날에도 청소년과 순결, 성폭력 피해자의 수호성인으로 전 세계 신자들의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춘천교구 제8대 교구장이신 김주영(시몬) 주교님께서 로마 교황청을 방문하시던 중, 당시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국장이신 한현택(아우구스티노) 몬시뇰을 만나시게 되었습니다. 주교님께서 이탈리아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민족화해위원장으로서 한반도의 평화와 북한과의 관계에서 화해와 일치를 위해서는 용서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을 들으신 몬시뇰께서, 성녀 마리아 고레띠의 성지에서 성해 분양이 가능하다는 소식을 전해 오셨습니다. 이에 따라 성해를 분양받아 김주영 주교님께 기증하셨습니다.
주교님께서는 한반도의 평화뿐 아니라 이 시대의 인간관계에서도 용서와 사랑이 중요한 덕목임을 강조하시며, 순례자들과 신자들이 성녀의 전구로 용서의 덕을 쌓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2026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성해를 효자동성당에 인계해 주셨습니다. 이후 성해는 본당 내 ‘용서와 사랑의 방’에 모셔졌으며, 2026년 9월 13일 정식 안치식이 봉헌되었습니다.